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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대한 단상

어쩌다보니 개발자 6: 해외 생활의 쓴맛을 맛보다

by 개발자 민디 2021. 12. 2.

 

기대와는 달리 UX학원은 첫날부터 고난과 역경이었다. 일단 원어민들이 편하게 마구잡이로 내뱉는 영어는 드라마나 영화의 영화와는 또 달랐다. 정말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첫날이다보니 수업보다는 다같이 모여서 소통하고 팀활동을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너무나 곤욕이었다.

 

더군다나 취업 연계되는 학원 특성상 대부분이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아이들이었다. 나로서는 감당 안되는 에너지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새 친해진 무리들이 여기저기 생겨 학원 전체가 떠들썩했다. 학창 시절부터 내성적이었던 나는, 그때의 나처럼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에 홀로 오도카니 남아있었다. 가끔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가 있었지만, 더듬거리는 어설픈 나의 영어에 모두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짓곤 서둘러 떠나갔다.

 

수업 방식도 너무나도 낯설었다. 각자의 생각을 말하도록 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질세라 서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바빴다. 한국식 주입식 교육에 아주 잘 순응했던 나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알아듣기 힘드니 다른 아이들이 말한것에 제대로 반응해주지도 못했고, 당연하지만 내 생각도 표현하기 힘들어 아주 짧게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영겁같던 첫날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나를 반겨주는 남편의 얼굴을 보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안의 모든 자존심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나름 좋은 대학 나와서 이름난 회사에 들어가 그 안에서도 인정받으며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던 내 콧대가 그 하루에 폭삭 주저앉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친구 사귀는것에 익숙지 않아 늘 혼자가 될까 전전긍긍했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했다. 언어가 안되니 내가 생각해도 내 모습이 너무나 바보같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한참 울고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내일 또다시 학원을 갈 생각에 끔찍했지만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자 결심했다. 그래, 어느 누가 이렇게 말도 못알아듣는 애랑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겠어. 누가 말걸고 싶어하겠어. 그냥 여기에 익숙해지자. 친구들을 사귀고 즐거운 학원 생활을 보내겠다고 기대하지를 말자. 그냥 왕따인셈 치자. 나는 왕따다.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나이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냥 혼자 좀 있으면 어때서. 밥도 혼자 좀 먹으면 어때서. 그게 뭐 대수인가. 내가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이 컸던 거야. 앞으로 수업이나 열심히 들어야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듯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정말 그럭저럭 괜찮게 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는 수업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어 영어로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는 상황도 많지 않았고, 생각보다 나말고도 혼자 밥먹는 아이들이 있어서 괜히 내적 친밀감도 쌓았다. '영어가 잘 안되니 프로젝트라도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에 남들보다 서너배씩은 열심히 했더니 어느새 인정해주는 애들이 하나둘씩 생기기도 했다. 내 더듬거리는 영어를 참을성있게 들어주고, 내가 말을 못 알아들어 몇번이나 다시 말해달라고 해도 기꺼이 다시 천천히 얘기해주는 아이도 있었다. 오며가며 따뜻하게 말 한마디씩 걸어주는 선생님도 있었고, 친해지기까진 못하더라도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해주는 아이들도 점점 많아졌다. 내가 만든 UX 컨셉이 인정받아 개발 단계로 가기도 했고, 달달 외운 대본으로 사람들 앞에서 발표했을 때 잘했다며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순간순간들이 쌓여가다보니 어느새 3개월이 흘렀다. 학원에서의 마지막 날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을 가득 채운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끝냈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을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 잘 버틴 내 자신을 토닥이고 싶었다. 오랜만에 걱정과 불안함과 긴장감 없이 아주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한동안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푹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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