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1년을 계획하고 갔던 어학연수를 6개월만에 자진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더이상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한번 부딪혀보자 생각했다. 정신차리고 다시 복학해서 최선을 다해 학교 생활을 했다. 엉망이었던 학점도 재수강을 통해 어느정도 복원했다. 그 결과 부분 장학금도 몇번 타고 제법 괜찮은 학점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다닐때 운좋게 삼성전자에서 인턴을 할 수 있었고, 그게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어, 남들보다 비교적 쉽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회사에 이 한 몸 불사르리라 열정 넘치게 입사를 했다. 물론 그 열정은 일 시작한지 3개월도 안되어 완전히 꺼져버렸다.
일이 없어도 눈치 보며 야근해야 하는 문화. 조금이라도 일찍 회사를 나서려고 하면 어김없이 "오늘 무슨 일 있어?" 소리가 돌아온다. (그래도 사수를 정말 좋은 분을 만나서 일이 없으면 나를 최대한 칼퇴 시켜주셨는데, 결국 그것때문에 사수님은 팀장님께 소환당하기도 했다.)
계획없이 윗사람 지시에 따라 진행되는 일들. A를 하라고 해서 하루종일 A를 하면, 저녁 시간이 다되어갈 무렵 A는 필요 없고 B를 하랜다. 위에서 지시가 그렇게 내려왔다고.
밤 열시에 내일까지 끝마쳐야하는 일을 던져주고 퇴근하는 팀장님. 새벽 세시까지 일 하다가 겨우 퇴근할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고 있나 싶었다.
무엇보다 개발팀인데 내가 속했던 팀 특성상 개발은 전혀 안하고 오로지 테스트만 하기 바빴다. 하루종일 하는거라곤 시료 핸드폰 붙잡고 기능 잘되나 안되나 테스트 하는 거였다. 내가 개발자인지 테스터인지 자괴감 들어...
이렇게 1년을 개발팀에서 지내다보니 난생 처음 우울증같은게 왔다.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이런 얘기를 어디다가 해도 "그 좋은 회사를 왜 그만두냐"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부모님께 울면서 호소해도 결론은 늘 "그래도 힘내서 잘 다녀라"였다. 처음으로 '아, 사람이 왜 자살이란걸 하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힘듦을 그 누구하나 제대로 공감해주고 이해해주질 않으니 외로움과 서글픔과 괴로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가슴 깊은 곳에 화가 계속 누적 되어, 나중에는 누가 건들기만 해도 폭발할 지경이 되었다. 하다하다 인사팀에 상담 신청하고 찾아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싶었다. 여기만 아니면 살 것 같았다.
변리사 공부 하겠다고 엄청나게 두꺼운 민법책 사서 출근전 새벽에 일어나 절박한 마음으로 보기도 했다. 이 개발팀만 벗어나면 뭐든 상관 없을 것 같아서 다른 팀들에서 사내 공고가 올라오면 여기저기 지원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UX팀에 공고가 났다. 선임(대리)급 이상 지원 가능이라고 써있었지만 그딴거 모르겠고, 공고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지원해도 괜찮을것 같다길래 절실한 마음으로 지원을 했다. 결과 발표가 나는 날, 정말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제일 떨렸던 것 같다. 마치 내 목숨이 여기에 달리기라도 한 것 마냥.
그리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 순간의 기쁨과 벅참과 행복함과 감동이란... 차마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개발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줄줄 났다. 이제 두번 다시 개발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 개발팀과 개발팀 문화가 싫었던 것이지만 이젠 뭐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나는 탈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그렇게 개발자 딱지를 떼고 UX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제2의 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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