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해보는 UX디자인은 물론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개발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한가지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개발할 때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 중엔, 개발(포괄적인 개발보다는 코딩에 좀 더 가깝지만)에는 정답이 있고, 그렇기에 그 정답을 찾을 때까진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빌드가 되냐 안되냐,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냐 안돌아가냐, 둘 중 하나다. 그 중간에서 만족해서 끝낼 수는 없다. 그리고 문제는 그 정답을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개발자라면 세미콜론 하나때문에 몇시간동안 삽질한 경험이 분명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반면 UX는 정답이 없기에 정해진 시간동안 최선의 답을 찾아 그것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내 계획하에 정해진 시간내에 끝낼 수 있는 것이다. 의외의 사건이 발생해서 갑자기 일을 끝마치지 못할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나에게는 이러한 확실성이 아주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또한 대기업 특성 상, 업무 분담이 아주 잘되어 있다는 점도 좋았다. 아마 규모가 작은 회사라면, 아무래도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해야하는 분야가 더 넓어야 할 것이다. UX는 물론이고 유저 리서치, 사용성 테스트, 비주얼 디자인까지 도맡아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의 경우 각 일을 수행하는 부서들이 다 따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UX디자인 하나에만 집중해서 할 수 있었고, 다행히 그 일은 나에게 제법 잘 맞았다.
그래서 UX팀으로 옮긴 이후로는 제법 평화롭게, 나름 만족하며 회사 생활을 했다. 물론 스트레스야 있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감히 천국이라고 얘기할 수 있었다. 딱히 목표나 꿈은 없었지만 그냥저냥 회사에서 하라는 일을 하며 지내는데 큰 불만이 없었다. 아마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쭉 UX팀에 있으면서 지금쯤이면 책임(과장)급이 되어 있었겠지.
어느날 남편이 덜컥 아마존에 합격했다. 아마존에서 한국 대상으로 대대적인 해외 채용을 한다길래 남편이 지원해보겠다고 했고, 늘 해외 생활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던 나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경험삼아 봐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코딩 테스트를 통과하더니 어어라? 하는 사이에 한국에서 면접이 잡혔고, 네시간에 걸친 면접을 보고 오더니 얼마 되지 않아 아마존 인사팀에게 축하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리하여 갑자기 한번도 밟아본 적 없는 캐나다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 언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지, 아니 돌아오기나 할지 기약도 없이.
부모님께 이 소식을 알렸더니, 우셨다.
나? 매우 불효녀같지만 나는 그저 마냥 신났다.
와아아아아아 퇴사다!!! 그것도 잘돼서 나가니 이것이야말로 경(퇴)사가 아니냐!!! 가본적은 없지만 캐나다에 대한 이미지는 당연히 좋았고, 거기에 따뜻한 서쪽 동네 밴쿠버라니 더더욱 좋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 매번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 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고 영어도 원어민처럼 잘하는 내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이 됐다.
회사에 퇴사 소식을 알렸다. 퇴사 이유는 "남편이 캐나다 회사에 합격해서요... 캐나다로 가게 됐어요". 그 누가 이 퇴사를 말릴 것인가. 부서장님도, 팀장님도, 인사팀도, 다들 부럽다며 축하한다고 말하곤 사직서에 오케이 싸인을 시원하게 날려주셨다. 퇴사 후 몇달간은 남편과 부모님, 그리고 시부모님과 여행도 신나게 다녔다. 아마 인생에서 제일 고민 걱정없이 돈 펑펑 써가며 놀았던 때인것 같다.
몇달간의 꿈같던 나날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2017년 7월, 드디어 남편과 나는 밴쿠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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