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많았던 첫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주로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할지, UX를 계속 해야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렇게 고민하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 영어. 이미 한번 언급한적 있듯이 UX는 주로 말로 컨셉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이번 회사를 다니면서도 뼈저리게 느꼈다.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이 너무나 초보적이라는데 있었다. 쉬운 영어로 떠듬떠듬 설명하려니 아무래도 전문성이 떨어져보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케이 동생의 얘기를 듣고 이 고민은 더 깊어졌다. 케이의 동생도 UX를 공부해서 현재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명 대기업 UX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동생이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영어 때문이라고 했다. 회의때마다 다들 너무 빠른 영어로 여기저기서 말하니, 그걸 따라가는게 그 동생에게도 쉽지 않다고 했다. 참고로 케이 자매는 케이가 고등학생때, 케이 동생이 중학생때 캐나다 이민을 왔고, 그 동생은 대학교때 영어 과외도 많이 할 정도로 특히 영어를 잘한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도 UX디자이너로써 일할때에는 힘겨움을 느낀다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정말 UX를 하고싶은가에 대한 문제. UX학원과 회사를 다니면서 느낀건, 내가 좋아하는 UX일은 전체 중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이었다. 화면 구성과 플로우를 짜는건 좋아하지만, 그 외의 유저 리서치 및 인터뷰/자료 및 데이터 조사/비쥬얼적인 부분 등등은 나와는 너무 맞지 않았다. 특히 내 컨셉을 설명할 때, 아무래도 비쥬얼적으로 눈을 사로잡는 요소를 곁들이면 사람들의 이목을 더 집중받을 수 밖에 없는데, 슬프게도 나는 그런쪽 센스가 참 없는 편이었다.
세번째, 로직과 플로우에 강하다는 나의 특성. 비쥬얼적인것엔 약했지만 나는 로직과 플로우를 짜는 일은 참 좋아하고 잘하기도 했다. 삼성에서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특히 그런쪽에 치우쳐져 있었는데, 그 일은 정말 신명나게 했었다. 캐나다에 와서도 종종 남편이 옆에서 알고리즘 문제를 풀고 있으면 나도 가끔 따라 풀곤 했는데, 잘은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재밌어하곤 했다.
네번째, 남편의 부추김. 이런 나의 성격과 특성을 아는 남편은 다시 한 번 개발을 해보지 않겠냐며 옆에서 부추기곤 했다. 나 또한 그러한 남편의 말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삼성에서 개발팀에 있긴 했지만 제대로 된 개발은 거의 해보지 않았기에, 정말 개발자로 일하는건 어떤 것일까 늘 궁금함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는 다른 개발팀 문화.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일하는 방식에 대한 얘기도 들어보니, 확실히 내가 겪었던 개발팀 문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일단 야근을 강요하는 문화가 없고(물론 필요할때는 알아서 하긴 해야할때도 있다), 자신의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일감이 생기면 팀원들끼리 논의해서 일감을 나누고, 리스크를 분석해서 대략적인 일정을 정한다. 만약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일정내에 일을 끝마치지 못하면, 다시 다같이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해 새로운 일정을 산출한다. 일하는 방식이 굉장히 말이 되고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남편과 심도깊은 얘기도 나누고, 머리 쥐어뜯으며 고민을 반복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다시 한 번 개발을 해보기로. 어렵거나 힘든 점이 있으면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남편의 말도 결정에 큰 몫 했다. 그렇게 개발과 개발팀이 싫다고 뛰쳐 나왔는데 다시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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